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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 요시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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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소 요시노부는 1692년에 태어나 1730년에 사망한 쓰시마 후추번의 6대 번주이다. 1718년 형 소 요시미치의 양자가 되어 가독을 상속받았으며, 검약령을 시행하는 등 번 재정을 회복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1721년에는 조선에서 문위행 사절단이 파견되었으나, 최상집 일행의 밀무역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39세의 나이로 오사카에서 사망했으며, 동생 소 미치히로가 양자로 뒤를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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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 요시노부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씨명소 씨(宗氏), 우지에 씨(氏江氏), 소 씨
이름소 요시노부(宗 義誠)
가명소노스케(増之介, 아명), 우지에 미치노부(氏江方誠, 초명), 요시시게
별칭시키부(式部, 통칭)
시호대운원전옥린고악대거사(大雲院殿玉橉高岳大居士)
묘소나가사키현(長崎県) 쓰시마시(対馬市) 고쿠분(国分)의 반쇼인(万松院)
시대에도 시대(江戸時代) 전기 - 중기
출생겐로쿠(元禄) 5년 3월 15일(1692년 4월 30일)
사망교호(享保) 15년 11월 6일(1730년 12월 15일)
관직 정보
관위종4위하, 시종(侍従), 쓰시마노카미(対馬守)
막부에도 막부(江戸幕府)
주군도쿠가와 요시무네(徳川吉宗)
쓰시마 후추 번주(対馬府中藩主)
가족 관계
아버지소 요시자네(宗義真)
어머니고몬(右門, 사사키 씨佐々木氏 ・ 홋세이인法性院)
양아버지소 요시미치(宗義方)
형제요시쓰구(義倫), 후루카와 사네코토(古川真言), 요시미치(義方), 다다 도모요시(多田倫寛), 요시노부(義誠), 미치히로(方熈), 다카세 유키미치(高瀬行方)
배우자정실: 히구치 사네미네(樋口真峯)의 딸 ・ 센주인(仙寿院)
자녀요시유키(義如), 요시시게(義蕃), 딸(마쓰다이라 다다나松平忠名의 정실), 딸(다이고 쓰네타네醍醐経胤의 부인), 딸(도도 다카하루藤堂高治의 정실), 양자: 미치히로(方熈)
기타 정보
전임 및 후임쓰시마후추 번(府中蕃) 번주
대수6
임기1718년 ~ 1730년

2. 생애

겐로쿠 5년(1692년) 3월 15일, 쓰시마 후추번의 3대 번주 소 요시자네의 일곱 번째 아들로 태어났다. 겐로쿠 16년(1703년) 1월, 형인 5대 번주 요시미치에게서 8백 석을 받고 분가하여 우지에 가(氏江家)를 세우고 우지에 미치노부(氏江方誠)라 칭하였다. 교호 3년(1718년) 형 요시미치가 사망하면서 그의 양자가 되어 쓰시마 소 가문의 가독(家督)을 잇고 쓰시마 후추번 6대 번주가 되었다. 이름을 소 요시노부(宗義誠)로 바꾸고, 12월에는 종4위하 시종(侍従) ・ 쓰시마노카미(対馬守)에 서위(敍位) ・ 임관되었다.

1721년(숙종 47년) 조선에서는 전임 도주 종의방(宗義方)의 죽음을 조문 및 위로하고, 종의성(宗義誠)의 승습(承襲)을 축하하기 위하여 당상역관 최상집(崔尙㠎)과 당하역관 이장(李樟)이 포함된 88명[1]의 문위행(問慰行) 사절단을 쓰시마에 파견하였다. 이들은 3월 18일에 쓰시마에 도착하여 6월 18일까지 후추에 머물렀는데, 당상역관 최상집 일행이 대부분의 조선인 사행원들이 가담한 문위행 사절단 최대의 밀무역 사건을 일으켰다. 이후 문위행 인원에 대한 통제와 사행원의 몸수색 등에 대한 새로운 규정들이 제정되었다.[2]

쓰시마 후추번의 재정을 일으키기 위해 검약령(倹約令)을 내리는 등 여러 시책을 시도하였으나 효과를 거두지 못했고, 오히려 재정난을 더욱 부추겼다. 교호 15년(1730년) 11월 6일, 적남(嫡男) 요시유키를 데리고 에도로 가던 도중 오사카에서 병으로 쓰러져 향년 39세로 사망했다. 요시유키가 어려 동생인 미치히로가 양자로 뒤를 이었다.

한국의 《변례집요》에는 영조 6년(1730년) 11월 6일에 죽은 옛 도주(소 요시노부)의 고부차왜(告訃差倭)로 등영통(藤英通, 하마다 겐자에몬浜田源左衛門)이 조선에 와서 소 요시노부가 작성한 유언장과 유품을 가져왔다고 기록되어 있다.

2. 1. 초기 생애

겐로쿠 5년(1692년) 3월 15일, 쓰시마 후추번 제3대 번주 소 요시자네의 일곱 번째 아들로 태어났다. 겐로쿠 16년(1703년) 1월, 형이자 제5대 번주인 요시미치에게서 8백 석을 받고 분가하여 우지에 가(氏江家)를 세우고, 우지에 미치노부(氏江方誠)라 칭하였다.[1]

2. 2. 쓰시마 번주 즉위

1718년(교호 3년), 형 요시미치가 사망하자 그의 양자가 되어 쓰시마 소 씨 가독(家督)을 잇고 쓰시마 후추번 제6대 번주가 되었다. 이름을 소 요시노부(宗義誠)로 바꾸고, 12월에는 종4위하 시종(侍従) ・ 쓰시마노카미(対馬守)에 서위(敍位) ・ 임관되었다.[1]

1721년(숙종 47년) 조선에서는 전임 도주 종의방(宗義方)의 죽음을 조문 및 위로하고, 종의성(宗義誠)의 승습(承襲)을 축하하기 위하여 당상역관 최상집(崔尙㠎)과 당하역관 이장(李樟)이 포함된 88명의 문위행(問慰行) 사절단을 쓰시마에 파견하였다.[2]

2. 3. 번정 개혁 시도와 실패

교호 3년(1718년), 형 요시미치가 사망하면서 그의 양자가 되어 소 가문의 가독(家督)을 잇고 쓰시마 후추번의 6대 번주가 되었다. 이후 소 요시노부로 이름을 바꾸었다.

쓰시마 후추번의 재정난을 해결하고자 검약령(倹約令)을 내리는 등 여러 가지 시책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재정난은 더욱 심화되었다.[1]

2. 4. 사망

교호(享保) 15년(1730년) 11월 6일, 적남(嫡男) 요시유키를 데리고 에도로 가던 도중에 오사카에서 병으로 쓰러져 향년 39세로 사망했다.[1] 요시유키의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동생인 미치히로가 양자로서 뒤를 이었다.[1]

한국의 《변례집요》에는 영조 6년(1730년) 11월 6일에 사망한 옛 도주(소 요시노부)의 고부차왜(告訃差倭)로 등영통(藤英通, 하마다 겐자에몬浜田源左衛門)이 조선에 와서 소 요시노부가 작성한 유언장과 유품을 가져왔다고 기록되어 있다.[1]

3. 조선과의 관계

1721년 조선 숙종은 전임 도주 소 요시미치의 사망을 조문하고 소 요시노부의 승습을 축하하기 위해 문위행(問慰行) 사절단을 쓰시마에 파견했다. 문위행은 당상역관 최상집과 당하역관 이장 등 88명[1]으로 구성되었으며, 3월 18일에 쓰시마에 도착하여 6월 18일까지 후추에 머물렀다. 이들은 대규모 밀무역 사건을 일으켰다.[2] 자세한 내용은 #최상집 밀무역 사건을 참고하라.

3. 1. 최상집 밀무역 사건

1721년 조선에서 전임 도주 소 요시미치(宗義方)의 죽음을 조문 및 위로하고, 소 요시노부(宗義誠)의 승습(承襲)을 축하하기 위하여 문위행(問慰行) 사절단을 쓰시마에 파견하였다. 3월 11일 당상역관 최상집(崔尙㠎)과 당하역관 이장(李樟)이 포함된 88명[1]의 문위행은 3월 18일에 쓰시마에 도착하여 6월 18일까지 후추에 머물렀다. 이때 당상역관 최상집 등은 당시 대부분의 조선인 사행원들이 가담한 문위행 사절단 최대의 밀무역 사건을 일으켰다.[2] 이 사건으로 조선과 쓰시마 간에 외교적 문제가 발생했고, 이후 문위행 인원에 대한 통제와 사행원의 몸수색 등에 대한 새로운 규정들이 제정되는 계기가 되었다.[2]

4. 가계

구 분내용
아버지소 요시자네(宗義真, 1639년 ~ 1702년)
어머니우몬(右門), 호쇼인(宝松院) - 사사키 씨(佐々木氏)
양아버지소 요시미치(宗義方, 1684년 ~ 1718년)
정실타케(竹), 센쥬인(千寿院) - 히구치 마네(樋口真峯)의 딸
측실아이나가 씨(間永氏)
양자소 미치히로(宗方熈, 1696년 ~ 1760년) - 친동생


5. 이름자를 받은 인물


  • 후루카와 노부쓰네(古川誠恒) - 요시노부의 형 나오코토(真言)의 적남으로 여겨진다. 딸 슈세이인(修性院)은 요시노부의 둘째 아들 요시시게(義蕃)의 정실이 되었다.
  • 후루카와 마사쓰네(古川誠恒) - 요시노부의 형이자 후루카와 마고토의 양자. 딸 슈쇼인은 요시노부의 차남 요시시게의 정실이 되었다.[1]

참조

[1] 문서 화교각서(和交覺書)
[2] 논문 도해역관사의 밀무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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